부족국가시대  |  삼국시대  |  고려시대  |  조선시대  |  근대의 씨름  |  현대의 씨름


씨름의 역사

 

부족국가시대
기원전 2333년 단군조선부터 삼국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부족국가 시대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씨름에 대한 자취는 '치우희' 라는 씨름의 명칭이다. 중국의 '25史'와 우리나라 '한단고기'중 '삼성기' 상ㆍ하 편에 보면 치우천왕에 관한 내용이 있는데 전설적인 군신이며 무신인 그의 이름을 딴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중국의 '후한서'와 우리나라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씨름에 관한 명칭인 '각저희'와 '씰흠'을 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상고시대에도 이미 씨름이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시대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은 위험을 피해 동부여(지금의 중국 길림성으로 추정)에서 졸본(卒本 / 지금의 중국 요동성으로 추정)으로 남하하여 그곳에 고구려를 세웠다. 이 나라는 소노(消奴)·절노(絶奴)·순노(順奴)·관노(灌奴)·계루(桂婁) 등 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졌는데 주몽이 고구려의 임금으로 오르기 전 계루부의 족장으로 있을 때 5부족장들의 고추가(古雛加:족장의 존칭) 시합을 열었다. 당시의 경기종목이 각저·궁사(弓射:활쏘기)·승마(乘馬)·수박(手搏) 등 다섯 가지였는데 고구려 초기에 씨름(각저)이 무예의 하나로 채택된 것으로 보아 더 멀리 부여에서도 이 경기를 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4세기경으로 추측되는 고구려 고분인 각저총(角抵塚) 주실(主室) 석벽에 두 사람이 나무그늘 아래에서 서로 맞붙어서 씨름하는 모습과 그 옆에 심판인 듯한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이 고분은 1905년에 발견된 것으로 만주의 통화성(通化省) 집안현(輯安縣) 통구(通溝), 즉 고구려의 옛 도읍지인 환도성(丸都城)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외에도 집안현의 장천1호분 벽화, 황해도 안악, 평안남도 강서 약수리 등에서 발굴된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씨름을 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고구려 귀족들의 무덤들에 그려져 있는 씨름 벽화를 통해 고구려시대에 이미 씨름이 성행하였으며, 고분 벽화에 남길 정도로 씨름을 매우 중요시 했음을 알 수 있다.
백제나 신라의 씨름에 관한 역사적 사료는 없으나 기타 문헌을 통해 볼 때 그 당시 삼국의 언어, 문화, 풍습, 놀이 등이 비슷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연중 행사로 씨름을 즐겨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각저총 씨름 벽화 >

 

고려시대
우리나라의 씨름이 최초로 문헌상에 기록된 시기이다.
고려사세가(高麗史世家) 36권에 의하면 '충혜왕 원년(元年) 1331년 3월에 국왕은 나라 일을 신하들에게 맡기고 매일같이 젊은 근시(近侍)들과 각력(角力)을 하였는 바, 이때에 상하 예의가 없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기록에는 '충혜왕 후(後) 4년(1343년) 2월에 용사들을 거느리고 씨름놀이를 보았으며, 5월에는 밤을 도와 씨름놀이를 보았으며, 11월에는 시가(市街)에 나가서 격구(擊毬)와 씨름을 보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충혜왕은 씨름 즐기기를 좋아 하였으며 궁내에서 행해질 정도로 씨름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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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고려시대를 거치며 유흥과 오락의 일면을 보이던 씨름이 점차 마을과 마을의 대항전이나 풍년을 기원하는 숙원행사, 단오절 씨름놀이 등 연례적인 대규모 축제의 형식으로 자리잡은 시기로 보여진다.
이 시대에는 다양하고 자세한 기록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김해읍지? ?완당집? ?경도잡지? ?동국세시기? 등의 문헌과 ?김홍도의 씨름그림? ?유숙의 대쾌도? ?기산의 풍속도? 등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세종실록(世宗實錄)제4권 - 세종원년(1419년) 6월에 상왕과 왕은 저자도(楮子島)에 행차하여 중류에 배를 뛰우고 종친(宗親)과 더불어 주연을 베풀고...... 곧 각력희(角力戱)를 강변에서 보았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제50권 - 세종12년(1430년) 윤 12월 형조에게 아뢰기를 중 상총이 양복산과 서로 씨름을 하다가 양복산이 죽었으니 율(律)에 따라 교형(絞刑)에 처할 것이나 한 등급을 감하고 장례비를 물게 하였다.

세종 13년(1431년) 3월에 왕이 경회루(慶會樓)에 거동하여 종친의 활쏘는 재주를 구경하고 역사 안사의 등으로 하영금 씨름을 하게 한 뒤 차등하여 상을 주었다.

동월(同月) 모화관에 거동하여 격구, 사, 기(擊毬, 射, 騎-방울치기, 활쏘기, 말타기)와 모구(毛毬)등 경기를 구경하고 그 중에서 5명을 뽑아서 씨름을 하게 하고 상(賞) 줌에 있어 차등을 주었다.

 

명종실록 26권
명종 15년 5월 단오날 동궁별감(東宮別監 - 왕자를 호위하는 장령)은 동방 북쪽에서 씨름놀이를 보다가 수 많은 관중속에 섞여 즐겨 놀았다 하여 간원(諫院 - 국왕에 충고 또는 건의하는 기관)으로부터 동궁별감이 서민속에서 천하게 행동하였다고 규탄하였다.

 

현종실록 7권
현종 5년 갑진년 정월에 광천(지금의 경기도 광주)저자도의 사삿집 종선이 같은 동리의 세현과 더불어 씨름을 하다가 이기지 못함에 노하여 찔러 죽였다.

 

현종과 숙종때(17세기말~18세기초)의 ?김해읍지(金海邑誌)?
김해읍 서쪽 인촌(隣村)의 아래편 두 마을에서는 매년 6월 그믐이면 군중들이 모여서 장대에 기를 달고 풍악을 울리면서 씨름판을 차리고 흥겨운 놀이를 계속하여 7월 7석에 이르러서는 씨름이 그대로 7석 놀이로 되었으며, 7월보름이 지나서야만 씨름놀이는 끝났다.

 

김정희 저 ?완당집(阮堂集-1786~1851년)? 제10권
단오절 씨름놀이 때는 마을의 노소 모두가 승부를 다투었으며 사람마다 녹음속에 모여서 기쁨을 같이 하였다.


단오 씨름에 온 마을 씨름꾼이 모여
임금 앞에서도 또한 재간 부리네
이기거나 지거나 모두 다 기꺼워 하니
푸른 버들 그늘속에서 웃어대는 도다


18세기말 정종 때 유득공 저 ?경도잡지(京都雜誌)?
서울 소년들이 남산아래에 모여서 씨름을 하였는데 그 방법을 말하면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두 무릎을 꿇고 각각 오른손으로 상대편의 허리를 잡아 끌며, 또 각각 왼손으로 상대자의 오른편 다리를 잡아 끌면서 일시에 서로 들어 다루는데 안으로 걸기, 밖으로 걸기, 돌면서 추켜 올리기 등 수가 있었다. 이러한 기술로써 행하는 우리 씨름을 중국 사람이 고려놀이(高麗伎) 또는 료교(??)라고 불렀다.

 

19세기초 순조 때 홍석모 저 ?동국세시기?
젊은이, 어린이들이 왜장(倭將) 북문인 신무문 뒤터에 모여서 각려, 즉 씨름놀이로써 승부를 걸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무릎을 꿇고 각각 오른편 손으로 상대자의 오른편 다리를 끌며 일시에 일어서서 서로 들어서 돌리는데 넘어진 자를 진 것으로 친다. 내국(內局), 외국(外局), 륜기(輪起) 등 여러 수를 쓴다. 그 중에서 힘이 세고 손이 빠른 자가 자주 이기게 된다. 이 사람을 도결국(都結局)이라 하여 판막음 이라고 하였다.

 

단원 김홍도의 씨름그림
씨름그림은 들배지기 수로써 상대방을 들어 메치려는 장쾌한 기세를 생동성 있게 표현하고 있다. 배지기를 드는 편의 중심은 땅 위에 튼튼히 잡혀 있으며 어깨의 높이는 상대의 어깨보다 밑으로 쳐져 붙어서 상대를 자기 몸 위로 들어 올리는 여유있고 믿음직한 동작을 취하고 있다. 들려지는 상대는 바른편 다리 무릎을 적수의 불두덩 사이에 붙이고 왼편 다리를 뒤로 뻗치면서 상대의 몸에 바싹 붙어서 적극적으로 방어하려는 활기있는 동작을 보여 주고 있다.
구경하는 많은 군중들은 갓을 쓰지 않고 상투바람으로 씨름판을 집중하면서 모두 유쾌하고 명랑한 모습들이다. 이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의 씨름은 군중들이 즐기는 낙천적인 대중적 경기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 단원 김홍도의 씨름도 >

 

혜산(惠山) 유숙(乳熟)의 대쾌도(大快圖)
19세기 조선의 풍속을 그린 민화이며 씨름과 함께 택견이 그려져 있다.


 

                       < 혜산 유숙의 대쾌도 >                                < 혜산 유숙의 대쾌도 중 씨름부분( 확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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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씨름
한국의 씨름이 근대에 와서 뚜렷한 단체나 기관의 주관하에 최초로 개최된 씨름대회는 1912년 10월 유각권구락부(柔角拳俱樂部)의 주관으로 서울 단성사에서 열린 대회였다. 그 뒤인 1915년 서울 광무대(光武臺)극장 주관아래 그해 음력 1월부터 4주일동안 열렸으며, 그 후로도 한동안 연례행사로서 같은 극장에서 씨름대회가 열렸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과 같이 조직적인 체육대회의 씨름대회라기 보다는 다분히 흥행성을 띤 대회였다.

그러나 종래의 민속적인 유희(遊戱)에서 탈피하여 현대적 경기로의 발전을 목적으로 개최된 씨름대회는 조선씨름협회 주최하의 ?전조선씨름대회?가 처음이다.
조선씨름협회는 일찍이 일본에서 체육의 근대교육을 받고 돌아와 당시 서울시내 각 고등보통학교(지금의 중.고등학교)체조교사직에 종사하던 강낙원(姜樂遠), 서상천(徐相天), 한진희(韓軫熙), 강진구(姜軫九) 등의 발기로 1927년 창립되었으며, 그해 9월 창립기념 ?제1회 전조선씨름대회?를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개최 했다.

경신학교(儆新學校), 중앙고보(中央高普), 보성고보(普成高普), 휘문고보(徽文高普), 협성실업(協成實業), 양정고보(養正高普), 숭의상업(崇義商業)의 7개교가 출전하여 단체전은 경신학교가 우승하고 개인전은 함흥출신의 이도남(李道南) 선수가 차지했다.

그 뒤 7년동안 계속해 오던 씨름대회는 1934년 11월 제6회 대회를 끝으로 중단된다.
2년후인 1936년 새로 거듭난 씨름협회는 조선일보사 강당에서 ?제1회 전조선씨름선수권대회를 개최하여, 100여명의 선수가 참여하는 대성황을 이룬다. 그러나 이 씨름대회도 6회 대회를 끝으로 1947년 제7회 대회를 개최하기까지 5년간 중단하게 된다.

1942년부터 일본 통치하에서 해방이 되던 1945년까지는 태평양전쟁이 가열하던 시기로서 일본이 총력을 기울이던 비상시기라 그때 형편으로는 도저히 씨름대회를 개최할 수 없었다. 또한 해방후 1947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기 1년전인 2년동안 미군정이 실시되어 정치 혼란기였으므로 또한 대회를 치를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씨름협회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재건(再建)하였는데 명칭을 '대한씨름협회'라 하였으며, 이 때의 회장은 제3대 서상천(徐相天) 회장이었다. 1936년 혁신후의 씨름협회 제1대 회장은 여운형(呂運亨)씨가, 제2대 회장은 이극노(李克魯)씨가 회장이었다.

이 ?전국씨름선수권대회?는 1947년 제7회 전국대회가 개최된 이래 오늘날까지 계속되어 오고 있다.
1954년 제10회 대회까지의 씨름은 이른바 중량급 씨름으로 단일체급 이었으나, 1955년 제11회 대회부터는 중량급(71kg 이상), 경량급(71kg 이하)으로 나누어 실시하였다.

1967년 제19회 대회부터는 체급을 더욱 세분화하여 체중에 따라 5체급으로 하고, 체급명칭도 개정하여 실시했다.

체 급 체중(kg) 체중(관)
소장급(少壯級) 60kg 이하 <16관> 이하

청장급(靑壯級)

67.5kg 이하 <18관> 이하

용사급(勇士級)

75kg 이하 <20관> 이하

역사급(力士級)

82.5kg 이하 <22관> 이하

장사급(壯士級)

82.5kg 이상 <22관> 이상

1968년 제20회 대회부터 1974년 제26회 대회까지는 체급을 재조정하여 실시하였다.

체 급 체중(kg) 체중(관)
소장급(少壯級) 67.5kg 이하 <18관> 이하

청장급(靑壯級)

75kg 이하 <20관> 이하

용사급(勇士級)

82.5kg 이하 <22관> 이하

역사급(力士級)

90kg 이하 <24관> 이하

장사급(壯士級)

90kg 이상 <24관> 이상

1975년 제27회 전국씨름선수권대회에서 또다시 3체급으로 조정하여 서울운동장에서 개최하였는데,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중인 홍현욱 선수가 당대 최고의 김성률 장사를 물리치고 우승해 전 매스컴에 대서 특필된 대회였다.

체 급 체중(kg)

경량급(經量級)

70kg 이하

중량급(中量級)

80kg 이하

중량급(重量級)

80kg 이상

<1950년대 말 중앙청(지금의 광화문)앞 광장에서 열린 씨름대회>

 

현대의 씨름
오늘날 씨름은 근대를 거치며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기본 기틀을 다진 씨름이 방송과의 유기적인 협조로 전국적인 붐을 일으키며 프로화를 통한 국제적 경기로 거듭나는 시기이다.

씨름에 있어 가장 큰 전환점이 된 시기는 1972년으로, 그해 9월 24일 ~ 26일까지 장충체육관에서 대한씨름협회와 KBS가 공동주최하고 문화공보부가 후원한 ?제1회 KBS배 쟁탈 전국장사씨름대회?였다.

이전까지 야외 모래판에서 실시하던 것을 실내의 매트에서 하게 되었고 경기가 열리는 3일 동안 KBS-TV에서 중계방송을 전국으로 실시하여 전 국민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이 경기를 보게 되었다. 특히 경기가 열리는 장충체육관은 인기 종목인 구기종목의 국제적인 경기가 있어야만 관중이 1,2천명 정도였으나 씨름경기가 열리는 연 3일동안 1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체육관을 빈틈없이 꽉 메웠으며, 관중의 일부는 서울근교나 지방에서 온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이 경기에서는 예선을 거친 8명의 장사가 풀리그전으로 거행된 경기에서 우승은 마산의 김성률(金成律), 준우승은 경북의 박범조(朴範祚), 3위는 마산의 정근종(鄭根種)이었다. 이제까지 뉴스로만 취급되어오던 씨름이 중계방송을 통해 전국으로 중계되었다는 것이 씨름발전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그 후로는 인기를 유지하다가 축구, 야구, 기타 인기종목에 눌려 70년대 후반에는 시들한 느낌마저 들 정도로 침체된 듯 하였다.

80년대 들어 정부의 스포츠 장려정책 분위기 속에 1981년 11월에 프로씨름 단체인 '한국민속씨름협회'가 창립되었고 1983년 4월에 KBS와 손잡고 개최한 '제1회 천하장사씨름대회'를 계기로 다시한번 크나큰 인기를 끌게 된다.

이 대회부터는 실내에서 매트위에 경기를 해오던 것을 처음으로 모래로 바뀌게 하였고 체급도 4체급으로 구분하여 시행하였다.
체급명칭 또한 우리나라의 명산의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서 태백급(75kg 이하), 금강급(75kg 이상 85kg 이하), 한라급(85.1kg 이상 95kg 이하), 백두급(95.1kg 이상)으로 정하고 체급의 제한없이 무제한으로 출전하는 천하장사(天下壯士)전이 있었다.

천하장사 결정전에는 450여명의 선수들이 출전한 가운데 결승전에서는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던 이준희(李俊熙)와 홍현욱(洪顯旭)선수를 물리치고 올라 온 한라급의 이만기(李萬基)선수와 최욱진(崔旭珍)선수가 맞붙어 이만기 선수가 3 : 2로 이기고 천하장사의 칭호와 함께 1천5백만원의 상금을 받았다.
(당시의 쌀 한가마 값은 4만원 정도)

경기방식에 있어 변화가 있었다면 종전에는 매트위에서 경기를 하던 씨름이 모래위에서 경기를 하게 되었으며, 경기장의 직경을 7m에서 9m로 늘리며 밀어내기를 없애 경기장 안에서 승부가 나도록 했다. 대전방식은 토너먼트(맞붙기)로 3판2승제, 장사결정전은 5판3승으로 하였다. 각 체급에는 청룡군(1군)과 백호군(2군)으로 나누어, 각 군에 8명씩의 장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1991년 9월부터는 체급을 변경하여 백두급(100.1kg 이상)과 한라급(100.0kg 이하) 두체급만으로 나누었으며, 씨름단간의 대결을 위하여 단체전이 신설되었다.

1981년 프로씨름단체로 창립된 '한국민속씨름협회'는 1983년 9월 대한씨름협회와 통합 운영되었으나 1990년 9월 체육부장관으로부터 '사단법인 한국민속씨름협회'로 독립을 승인받아, 대한씨름협회와 분리되어 1991년 2월부터 프로씨름대회를 독자적으로 운영하였다.

1994년 제8대 김재기 회장의 취임으로 협회 명칭을 '사단법인 한국민속씨름위원회'로, '회장'을 '총재'로 변경 사용하는 정관을 통과시키며 씨름의 위상을 한단계 높인다.

1996년에는 씨름의 국제화와 세계화를 위해 '사단법인 한국민속씨름위원회'를 다시 '사단법인 한국씨름연맹'으로 개정하고, 전문위원의 기능을 강화해 그해 설날장사씨름대회부터 의식무와 고천문, 선수몸본 등을 처음으로 시행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는 씨름단의 연이은 창단으로 8개 씨름단 총 100여명의 선수가 활동했으며 KBS중계권료의 인상으로 인한 기금확충 등 프로씨름이 내적, 외적으로 가장 안정된 시기였다.

그러나 1997년 IMF금융위기 이후 씨름단의 연이은 해단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프로씨름은 2000년대 중반까지 LG투자증권 황소씨름단, 현대중공업 코끼리씨름단, 신창건설 코뿔소씨름단 등 3개 씨름단으로 운영되었으나 그나마 2004년 12월 LG씨름단이 해단되고 이듬해인 2005년 신창씨름단 마저 팀을 해체함에 따라 프로씨름의 존립이 위협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에 한국씨름연맹은 2005. 9. 30 대한씨름협회와 선수파견에 관한 협약을 맺어 대한씨름협회 소속 지자체-실업씨름단 선수들을 프로씨름대회에 출전시켜 지역연고제의 안착을 목표로 프로씨름대회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게 된다.

그러나 대한씨름협회는 2007년 1월 한국씨름연맹과 맺은 선수파견에 관한 협약을 파기하고 독자적으로 프로씨름대회를 표방한 민속씨름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2008년에는 부산에서 열린 세계사회체육대회 기간 중 한국 씨름에 매료된 29개 참가국 대표들의 만장일치로 '세계씨름연맹(총재 윤명식)'이 창설되어 현재 전세계 40여개국의 회원국을 확보하고 대륙별 씨름선수권대회, 월드씨름챔피언십 등의 대회를 개최하며 씨름의 세계화를 위해 앞장서고 있다.

또한, 2003년 3월에는 대한씨름협회 산하에 '한국대학씨름연맹'이, 그해 8월에는 국민생활체육회 산하에 '국민생활전국씨름연합회'가 창립되어 각 분야에서 씨름의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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